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아이티 대통령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의 조브넬 모이즈(53) 대통령이 7일(현지시각) 새벽 암살당하면서 아이티 정국은 혼란과 불확실성에 빠져들고 있다. 클로드 조제프 총리 대행은 아이티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민에게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나섰다.

범인들은 누구?

 

모이즈 대통령은 이날 사저를 습격한 괴한들에게 총격을 당해 숨지고, 부인 마르틴 모이즈도 부상을 당해 병원에 옮겨졌으나 위중한 상황이다. 범인들 정체와 구체적 범행 동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레옹 샤를 아이티 경찰청장은 이날 모이즈 대통령을 살해한 용의자들을 “용병”으로 지칭하며 4명을 사살하고 2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보도했다. 그는 아직 붙잡히지 않은 용의자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샤를 청장은 용의자들이 누구이며 범행 동기가 무엇인지 등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앞서 조제프 총리 대행은 모이즈 대통령의 암살 소식을 전하면서 “스페인어와 영어를 쓰는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포함된 무리”라고만 밝혔다. 미국의 <시엔엔>(CNN)은 미국 주재 아이티 대사 보치트 에드먼드를 인용해 이들이 “용병”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에드먼드 대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들의 정체에 대해 “잘 훈련된 킬러”라며 “고용된 외국인 용병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장 영상을 보면 이들이 미국 마약단속국(DEA) 복장을 하고 있었다며 “가짜 마약단속국 요원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에드먼드 대사는 이들 범인의 행방과 관련해선 “현재 이 나라에 있는지 떠났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이 아이티를 탈출했다면 육로로 연결된 유일한 옆 나라인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망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아이티 공항은 모이즈 대통령 암살 직후 폐쇄됐다.

모이즈 대통령은 누구인가?

모이즈 대통령은 성공한 바나나 수출업자 출신이어서, 정계 입문 이후 ‘바나나 맨’으로 불렸다. 그는 아이티 정계 입문 이후 야당 인사들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논란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2015년 대선에 중도우파 정당의 후보로 승리했지만, 야당이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나서 오랜 갈등 끝에 1년 여 뒤인 2017년 2월이 되어서야 ‘지각’ 취임을 했다. 그는 최근 헌법에서 보장한 5년 임기가 언제 끝나는지를 놓고도 야당과 다퉜다. 그는 대통령 임기가 1년 여 늦게 시작된 만큼 내년 2월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야당은 헌법상 대통령 임기는 당선된 직후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올해 2월 임기가 끝났다며 조제프 메센 장 루이스 대법관을 대통령 대행으로 지명했다. 이에 대해 모이즈 대통령이 ‘쿠데타 음모’라며 관련자 23명을 무더기로 체포하고 나서면서, 정국의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이번 암살 사건의 배경에는 아이티의 만연한 폭력과 범죄, 가난 등이 맞물려 있다. 아이티의 거리는 범죄집단의 시민 납치와 폭력, 범죄집단 간 다툼, 범죄집단과 경찰의 총격전 등에 항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올해 상반기에만 아이티인 278명이 범죄집단과 연루된 폭력으로 숨졌다. 아이티 정부는 이런 폭력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권단체에서는 정부가 일부 이들 범죄집단과 연루돼 있다고 비판해왔다. 코로나19 확산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아이티는 아직 백신 접종을 시작도 못한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일 정도로 코로나19에 무방비 상황이다. 존스홉킨스대 병원의 집계에 따르면, 아이티는 1만9천명의 확진자와 465명의 사망자가 보고됐다. 코로나19 확산은 빈곤율이 60%에 이르는 최빈국 아이티의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지난해 아이티 경제는 3.8% 후퇴했다. 유니세프는 지난 5월 아이티의 심각한 어린이 영양결핍이 올해 두 배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누가 뒤를 잇나?

 

누가 모이즈 대통령의 뒤를 이어 국정을 맡을지 불투명하다. 헌법상 대통령 승계 1순위는 대법원장이다. 그러나 르네 실베스트레 대법원장이 최근 코로나19로 사망해 공석이다. 조제프 총리 대행은 모이즈 대통령이 암살된 직후 비상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계엄령을 선포한 뒤 국민에게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등 혼란에 빠진 국정을 책임질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조제프 총리가 정식으로 대통령 대행을 맡기 위해선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의회는 선거가 치러지지 않아 사실상 공백 상태다. 하원은 구성조차 안돼 있으며, 상원은 의원 3분의 1만 임기가 남아있다. 의회 선거는 오는 9월 예정돼 있다. 또 조제프 총리 대행은 퇴임을 앞두고 있다. 모이즈 대통령은 지난 5일 새 총리로 아리엘 앙리를 지명한 상태이다. 이래저래 아이티의 혼란이 당분간 더욱 극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반복되는 아이티의 정치적 불안정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300년 이상 받았으며, 프랑스를 상대로 노예해방 전쟁을 치른 끝에 1804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아이티 역사에서 정치적 폭력과 독재, 정국 불안정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15년 7월엔 아이티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이 암살됐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위드로 윌슨 대통령은 아이티에 군대를 파병했다가 1934년 이후 철군했다. 1957년부터는 듀발리에 부자가 대를 이어가며 폭력적인 독재정치를 했다. 아버지 프랑스와 듀발리에는 스스로 종신 대통령으로 선포하고 광범한 인권탄압과 폭압정치로 악명이 높았으며, 1971년 그의 사후에는 당시 19살이던 아들 장클로드 듀발리에가 뒤를 이어 1986년까지 철권 독재정치를 펴다가 축출됐다. 1990년 처음으로 자유선거가 도입됐다. 그러나 정치 폭력은 근절되지 않았다. 2017년엔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의 차량 행렬이 총격당했다.

전세계 비난과 애도 물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성명을 내어 “우리는 모이즈 대통령에 대한 끔찍한 암살과 부인에 대한 공격 소식을 듣고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며 “이 극악무도한 행위를 규탄하며, 부인의 회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아이티 국민에게 애도를 전한다”며 “우리는 안전한 아이티를 계속 지지하면서 지원할 준비가 돼 있다”고 덧붙였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오는 9월로 예정된 아이티 선거가 진행돼야 한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콜롬비아의 이반 두케 대통령은 모이즈 대통령의 암살에 대해 “야만적인 바보 같은” 짓이라고 비난했고, 칠레 세바스찬 피녜라 대통령은 “단결과 평화가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아이티가 겪는 심각한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찾아 줄 것”이라고 위로했다.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흐스는 암살을 “가장 강한 어조로” 비난하고 “범죄자는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